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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민주혁명의 시작, 5월 3일 그날을 돌아보다

기사승인 2022.05.01  21: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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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5·3 민주항쟁 정신 계승비

인천 2호선 시민공원역 1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3분도 채 안 되는 거리. 여기에 '옛 시민회관 쉼터'란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고개를 한 번만 쓱 돌려도 공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크기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비석 하나가 있다. ‘다시 부르마, 민주주의여!’라고 적힌 꽤 큰 크기의 돌덩이이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맡은 바를 다 못한 듯, 문구에서는 비통한 심정이 느껴진다. 그 옆에는 ‘1986년도 군부독재에 항거한 인천 5·3 민주항쟁 정신 계승비’라고 쓰인 작은 비석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이 비석들이 세워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36년 전 그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한이 맺힌 글귀가 적히게 된 것일까?

버스 시설물을 동원하며 시위하는 시민의 모습 (사진출처=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5월 3일, 그날의 인천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 독재의 탄압하에 있던 1985년,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은 총선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킨다. 신민당은 1986년 3월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개헌추진위원회 시도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이하 개헌 현판식)’을 전국적으로 개최한다. 이때, 부산에서 10만, 광주에서 30만, 대구에서 20만 명의 엄청난 인파가 몰려 민주화를 요구한다. 그동안 독재 정권의 탄압에 억눌려있던 대중의 분노가 신민당 개헌 현판식을 계기로 터진 셈이다. 관심은 자연스레 5월 3일로 예정된 인천 결성대회로 쏠렸다. 인천이 서울과 인접한 수도권 지역이고,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그해 4월, 여야의 개헌 논의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한다. 이에 신민당 일부 지도부가 “일부 학생들의 과격한 주장은 지지할 수 없다”며 민주화 운동 진영과 선을 긋고 전두환 정권에 타협하는 태도를 보였다. 신민당의 친정부적인 태도에 분노한 민주화 운동 단체들은 인천에서 열릴 개헌 현판식을 기약한다.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 현판식 인천지부 결성대회 당일, 행사는 오후 2시부터 열릴 예정이었지만 개최 장소인 시민회관 주변은 오전부터 긴장감이 역력했다. 독재정권과 신민당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수도권 지역 노동권, 학생, 시민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억눌려있던 감정은 정오쯤 터졌다. 시위가 시작되고 순식간에 시민회관 사거리는 최루탄 가스와 화염, 연기로 가득 찼다. 개헌 현판식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당시 홍사덕 신민당 대변인은 준비해온 결성대회 대본을 다 읽지도 못한 채 퇴장했고, 김영삼, 이민우 등 신민당 지도부는 행사에 입장조차 못 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최루가스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해서 군사 독재 정권의 파렴치한 탄압을, 신민당의 기회주의적인 타협을 비판했다. 경찰과의 마찰에도 굴하지 않고 버스 시설물까지 동원하며 시위 공간을 지켜냈다. 경찰들의 진압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부터였다. 전투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됐다. 그럼에도 밤까지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됐고, 5·3 민주항쟁은 결국 막을 내렸다. 이날 연행된 사람만 무려 약 400명에 이른다.

당시 상황을 ‘인천사태’라고 묘사한 언론보도(경향신문 보도)

' 역사' 5·3 민주항쟁

 

사실 5·3 민주항쟁은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사 책을 봐도 5·3 민주항쟁에 대해 아예 나와있지 않거나 간략하게만 서술돼 있다. 설령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다고 해도 그 의미가 왜곡된 경우가 많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5·3 민주항쟁을 주도했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우재 이사장은 “전두환 정권이 시위의 폭력성만 대대적으로 보도해서 아직 덜 알려져 있다”며 “(많은 사람이) 전두환 정권 중 일어났던 조금 큰 시위 정도로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5·3 사태’라고 부른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 오경종 센터장도 “언론들이 5·3 민주항쟁에 대해 악의적인 보도를 했기 때문”이라며 “극렬, 좌익분자들에 의한 난동, 폭도로 규정돼 있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시위대를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묘사한 기사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폭력 난무 시가 공포의 도가니”(1986.05.05 경인일보), “좌익정체 드러낸 인천사태”(1986.05.05 경향신문), “인천 사건의 파장-급진세력의 폭력은 민주화에 역행한다”(1986.05.05. 동아일보). 기사 헤드라인과 사설 제목들만 봐도 알 수 있듯 많은 기성 언론이 5·3 민주항쟁의 폭력성만 조명하며 악의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시위대의 이런 과격한 모습은 경찰이 유도한 측면도 있다. 당시 경찰은 5월 3일 신민당 개헌 현판식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시위 현장으로의 진입을 통제하지 않았다. 시위대 규모를 키우기 위한 계략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날 오후 3시 30분이 넘은 시각에는 시위 군중 사이로 진압용 페퍼포그 차량(고추를 의미하는 Pepper와 연기를 발사하는 차량을 뜻하는 Fogger를 합친 말, 최루가스)을 진입시키기도 했다. 시위대를 흥분시킬 목적이 훤히 보이는 술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날 시위의 폭력성과 과격성을 부각하며 그 정당성을 폄하하고 이를 기점으로 민주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오 센터장은 5·3 민주항쟁에 대한 악의적인 인식에 대해 “5·3 민주항쟁은 재평가돼야 한다”며 “최루탄 가스라는 고통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인천 5·3 민주항쟁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 (사진출처=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5·3 민주항쟁의 의의

세간에 본연의 가치가 잘 알려지지 못한 5·3 민주항쟁이지만 의의는 분명 크다. 개헌 정국 열세에 있었던 전두환 정권은 5·3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 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이 터졌고, 이는 수많은 시민의 분노를 끌어냈다. 결국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민주항쟁이 일어 대통령 직선제를 명시한 6·29 선언까지 이뤄졌다. 약 1년 전에 인천에서 일어난 5·3 민주항쟁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5·3 민주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밑거름이라고 입을 모은다. 류창호 본교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5·3 민주항쟁에 대해 “87년 민주화 투쟁의 초석”이라 말했다. 이 이사장과 오 센터장도 ‘6월 항쟁으로 가는 기폭제’, ‘민주주의 근간을 형성한 중요한 사건’이라며 5·3 민주항쟁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5·3 민주항쟁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여기에 머무르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해요. 그건 당신들 몫이에요.” 이 이사장이 인터뷰 끝자락에 건넨 말이다. 앞으로 더 성숙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후대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2022년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가 두 차례나 있는 해다. 대통령 선거는 지나갔지만, 곧 다가올 6월에 지방선거라는 또 하나의 선거를 앞두고 있다. 옛 시민회관 쉼터 비석에 적혀있는 그 문구가 더 이상 비통해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해야 하지 않을까.

이재원 기자 ljw3482@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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