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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一刀兩斷(일도양단) 死劍後已(사검후이)

기사승인 2024.06.02  21: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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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가 나는 싫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때리는 운동을 하라고 하십니까?”

소년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소년은 초등학생 시절 유달리 몸이 약했다. 그런 소년에게 아버지는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자전거를 끌고 와 뒷자리에 타라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아버지의 말이 무서웠고, 자전거에 타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그의 눈에는 아버지를 따라갔던 풍경이 선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길의 끝에 다다라 소년의 눈앞에 보인 곳은 ‘전라북도 경찰국 상무관’이었다.

그는 검도의 첫인상을 다음 같이 묘사했다. “경찰국 안에 상무관이라는 도장이 있는데, 도장을 가 보니 사람들이 뭘 뒤집어쓰고 기합을 넣으면서 막 두드려 패고 있었다.” 처음에 너무 무서워 도망쳐 나왔고, 사람을 때리는 검도에 거부감을 느꼈다. 일주일 후 아버지가 말했다. “검도를 해라. (검도는) 사람을 때리는 것만이 아니다. 너는 성장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검도를 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이후 그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이끌린 한 소년의 길이, 대한민국 검도 역사에 족적을 남긴 한 인간의 길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박학진(이하 박 감독). 현 검도 국가대표 총감독이자, 인천광역시 검도회 회장을 역임 중인, 검도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첫 훈련∙∙∙기본, 기본, 기본

박 감독은 첫 훈련 당시 죽도는 손에 잡아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묵상(무릎을 꿇고 앉아 정좌한 후 하는 명상 수행법)만 20분 가까이했다. 어린 나이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묵상을 20분씩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죽도를 잡고 동작하는 것을 가르쳐야지, 묵상만 하니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나 돌이켜보니, 묵상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했다.

묵상이 끝난 이후에는 기본기의 연속이었다. 검도에서 중요한 것은 ‘발의 동작’이다. 죽도로 상대를 타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바로 ‘발’이다. 발이 공격거리까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3개월을 발 연습만 했다. 앞으로, 뒤로, 우로, 좌로∙∙∙ 3개월 내리 발동작을 한 이후에야 그는 죽도 한 자루를 받을 수 있었다.

테이프로 칭칭 감긴 죽도의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검도 장비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구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시대 때 일본 경찰들이 남기고 간 낡은 호구들을 수리해서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그는 처음 죽도를 쥐었을 때를 회고한다. “마음이 또 달랐다.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겁이 났다. 내가 죽도를 잡고 상대의 머리를, 손목을, 허리를 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타격대에 타격을 하지 못하고, 죽도를 살짝 갖다 대는 동작만을 반복했다. 이에 선생님은 그에게 말했다. “일도양단(一刀兩斷)해라.” 이 과정에서 그는 ‘한칼의 개념’을 배운다. 한 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칼에 두 번은 없다. 조금씩 배워가며, 끊임없이 기본기를 반복했다.

2년 6개월간 수련한 기본기는 훗날 그의 검도 인생에 거대한 자산이 됐다. 하지만 꼭 같은 반복 과정은 괴로울 뿐이었다. “지루했다. 계속해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고민이 됐다. 어린 나이에 자발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해야 했다. 어렸을 때는, 그랬다.” 이후 그는 중학교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점차 검도가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였고,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게 된다.

65년 검도 외길 인생

박 감독은 지금까지 65년 동안 오직 검도 하나만을 보고 살아왔다. ‘검도 외길 인생’이라 자평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는지 묻자, 특별한 하나의 순간보다는 인생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기억이라 전했다. “몇몇 일이 생각 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 혼자 바보 같이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웃음을 머금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대학 선수 시절에는 하나의 목표를 꿈꿨다.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다는 ‘국가대표’를 말이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친구들이 놀러 갈 때도, 홀로 도장에 와서 개인 훈련을 했다. 선생님들의 지적 사항을 머리가 나빠서 기억을 잘 못해 노트에다 빠짐없이 필기했다. 느낀 점과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필기했다. 그리고 달에 한 번씩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지는 훈련은 고통뿐이었다. “이걸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잡념도 섞여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면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 않겠는가. 또 내가 처음 하고자 했던 목표를 달성해야지, 못하면 내 인생이 앞으로 무엇이 되겠는가.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어떤 역경과 훈련도 인내심을 가지고 견뎌서 나를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저절로 했다.”

각고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그는 결국 국가대표의 꿈을 이룬다. ‘박학진’이라는 이름을 인정받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대회 때, 그러니까 1985년도가 기억에 남는다. 이전 대회보다 거의 5배 많은 훈련을 했고 좋은 성적을 거뒀다.” 대회가 끝난 이후에는 프랑스 검도연맹 회장이 그를 초청해서 프랑스 국가대표 감독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생활 여건도 마련해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 좋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한다. “2003년도 영국 대회 감독 당시 준우승을 할 때도 기억이 있다. 역대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 중 일본과 대표전까지 전개된 상황이 내가 감독을 맡을 때 처음이었다. 개인전에서도 입상을 2명이나 해 지도자로서 보람을 많이 느낀 순간이었다.”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룬 성취가 인정받는 순간들이었다. 이에 대한민국 체육훈장(기린장, 백마장, 맹호장)을 3회 수장하는 명예를 누린다. 박 감독은 올해 7월 열릴 제19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 남녀 총감독으로 출진한다. 그는 자신을 내비치며, “중앙연수원에서 선수들이 훈련하며 기량을 쌓고 있다. 우리가 일본의 벽을 깨부수고 정상에 설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인천 짠물에서 제2의 고향으로

한편 그와 인천의 이야기도 뜻깊다. 당시에는 인천 사람을 ‘인천 짠물’이라 말했다. 바닷가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텃세가 심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런 인식이 있던 만큼 박 감독은 아무 연고 없는 인천에 처음 올 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행히도 걱정은 잘못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마음이 여유롭고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래서 ‘소문이 맞는 것은 아니구나, 좋은 사람이 많구나’라고 생각해서 인천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돕고 싶다 다짐을 했다.”

이어 그는 인천전문대학 감독 시절을 회상했다. “나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승부욕을 가져 선수들한테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킨) 선수들을 보면 지금도 미안하다.” 이어 속사정을 밝혔다. “우리는 전문대학이다 보니 핸디캡이 있었다. 다른 대학은 4년제라 선수층이 3, 4학년 위주로 나오는데 우리는 2년제라 신입생 1년이 지나면 바로 졸업생이 돼 버린다. 이 핸디캡을 줄이기 위해 훈련 강도를 엄청 높였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전문대학에서 전국 체전을 나가 단체전을 우승한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격인데 그걸 이룬 것이다. 선수들과 즐거움도, 괴로움도 함께 했고 때로는 눈물도 같이 흘렸다.”

소중한 기억이 어린 그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 됐다. “사람은 나이 들어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찾아간다고 하는데 나는 고향으로 안 갈 듯하다. 그냥 인천에 묻힐 것 같다. 그 정도로 인천이 좋고, 또 인천 사람에게 따뜻함을 느꼈다. 앞으로도 인천시 검도를 도울 수 있도록 회장의 역할을 할 것이다”라며 인천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검도는 내 인생의 전부다”

그에게 검도란 무엇인가. 그는 단호히 말한다. “검도는 내 인생의 전부다. 검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운 일, 복잡한 일이 생기면 검도 정신으로 생각한다. 검도 정신이란 검도를 하고 행복을 느끼면서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다.” 검도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같이 하기에 말이다.

박 감독은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됐다고 돌이켰다. 후회 없는 검도 인생을 돌이킨 그는 “이루고 싶은 건 다 이뤘다. 이뤘던 모든 것을 잘 관리하고 끝까지 ‘박학진’이라는 이름이 ‘참 멋있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관리를 잘하고 싶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내려놓았다.

이야기는 끝마쳤지만, 그의 검도는 끝나지 않았다. 죽은 이후에야 검을 내려놓겠다는 ‘사검후이(死劍後已)’를 좌우명으로, 박 감독은 다시, 검을 잡아 올린다.

박재형 편집국장 qkrwogud0@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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