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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담론] 혐오도하기(嫌惡渡河記)

기사승인 2024.06.02  21: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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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기자

세계는 혐오에 휩싸여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사회는 무너지고 분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인터넷 세상 속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경쟁사회가 전면화되고, 상대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돼버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혐오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혐오는 이해와 연민보다 쉽다. 간편한 인스턴트 음식과도 같다. 그러나 혐오는 분노를 낳는다. 타인에 대한 공격을 일삼도록 만든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 사회에도 적용되고 있다. 이는 그러한 작동 방식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에 근거해 휘두르는 폭력이기도 하다. 동시에 공동 사회를 개척하기보다 남을 짓눌러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착각이다.

공격은 복수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자신이 받은 공격을 몇 배로 되갚아 주겠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개인을 향한 공격은 개인이 속한 집단을 향한 것으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개인은,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느낄 때 자신이 속한 집단 속으로 더욱 파묻히는 경향을 가진다. 그에 따라 집단은 ‘개인끼리의 분쟁’을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상대가 속한 집단을 가격한다. 그렇게 집단과 집단이 대립하고 결국 사회를 갉아먹기에 이른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혐오의 시대를 살펴보면 꼭 이와 닮은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 이면에는 이성 지상주의도 자리하고 있다. 앞서 말한 ‘합리적 작동 방식’은 ‘이성이 제일’이라는 논리도 함께 이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저열한 것 혹은 저급한 것으로 격하된다. 문제 해결은 ‘이해’에 기반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감정으로부터 비롯되고 작동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저열한 것이 돼버린 감정은 사회에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민도 소거되기 시작했다. 일종의 굴레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리에서 우리는 어디를 지나고 있는가. 전면전이 돼버린 혐오의 시대에 한낱 개인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뻔한 얘기이지만 개인의 각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혐오와 분노는 외부 자극에 의해 촉발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반복 속으로 투신할 것인지 깨어나고 벗어날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먼저 혐오를 종용하는 압력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개인의 문제와 갈등은 개인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자신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후로는 타인을 이해하고 연민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나보다 더 큰 상처를 입힐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혹은 그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집단 간 분쟁과 대립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분노’의 동력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혐오가 일상이 돼버린 시대에,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영원한 분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뛰어내릴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족쇄를 끊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재훈 기자 ljh1109@inha.edu

<저작권자 © 인하프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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